통상 압력과 물가 불안, 위기를 넘어서는 구조 개혁의 길 백혜숙 전)서울시농수산식품공사 전문위원 이재명 정부의 핵심 정책기획기구인 국정기획위원회는 5년간의 국정 방향과 과제를 종합적으로 설계하고 실행 체계를 마련하는 전략적 조정 기구다. 최근 국정기획위원회는 기본사회 실현을 위한 핵심 과제들을 구체화하고 실행 체계를 설계하기 위해 기본사회 태스크포스(TF)를 공식 출범시켰다. 이는 국민의 기본적인 삶을 국가 공동체가 구조적으로 책임지는 사회로 전환하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공약에 따른 후속 조치다. 향후 기본사회 TF는 기본생활 보장을 위한 국가전담기구, 즉 기본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 위원회 설치를 향한 정책적 초석이 될 전망이다. 이렇듯 국민의 삶을 지탱하는 구조를 재설계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외부로부터의 통상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특히, 30개월령 이상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제한 해제와 유전자변형 감자(LMO) 수입 허용 요구는 한국의 식량주권, 식품안전, 식량・농업정책의 자율성을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안임을 인식하고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한편, 농축수산물 가격의 높은 변동성과 함께 가공식품과 식자재 등 필수재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하면서 취약계층이 체감하는 생활물가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생산비용 증가가 장기간 소비자 가격에 전가되면서 저소득층과 고령층 등 사회적 약자의 생계 부담이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수도권 중심의 주택가격 상승은 주거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은 물론, 주거 양극화를 부추기며 가계의 생계 기반을 위협하고 있다.
구조적 과제를 푸는 해법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두 가지 구조적 과제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첫째는 기후위기와 글로벌 통상 압력 속에서 식량주권과 기본식료체계를 어떻게 확보하고 지속가능하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고, 둘째는 고물가와 주거 양극화가 심화되는 현실 속에서 국민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정부가 어떻게 책임지고 재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이다. 두 가지 구조적 과제를 해소하기 위한 개혁의 실질적 해법은 기본사회 실현을 통해 국민 삶의 조건을 공적 부문에서 책임지는 사회적 기반을 제도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서는 첫째, 기본사회 실현을 총괄할 컨트롤타워로서 ‘기본사회를 위한 회복과 성장 위원회’와 같은 국가전담기구를 설치함으로써 정책의 기획부터 이행, 평가까지를 통합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식량, 주거, 돌봄, 교육, 의료, 디지털 등 삶의 핵심 영역을 포괄하는 ‘10대 기본서비스 분야’를 중심으로 생애주기별 보장 체계를 정비해 공공급식 확대, 공공임대 확대, 지역 돌봄 인프라 구축 등 구체적 실행사업을 병행해야 한다. 셋째, 기본서비스 제공 주체를 공공기관에 한정하지 말고 협동조합・사회적기업・마을기업 등 사회적경제 주체가 참여하는 지역 거버넌스를 구성함으로써 지역 단위에서 실천 가능한 실행력을 확보하고 중앙과 지방의 유기적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후위기와 디지털 전환에 대응할 수 있는 식량주권, 유통 민주주의, 공공 데이터 인프라 등의 새로운 정책 영역을 기본사회 전략에 통합함으로써 단지 복지의 확대가 아니라 경제와 산업 구조 전환을 동반하는 새로운 사회계약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기본사회는 바로 이러한 구조적 전환을 위한 새로운 사회계약이며, 단순한 복지를 넘어 경제 전략으로 작동한다. 혁신성장을 가능케 할 인재와 사회적 기반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스타트업, 바이오, 인공지능, 재생에너지와 같은 미래 산업의 경쟁력을 뒷받침하는 기반은 국민 삶의 안정성에서 출발한다. 국민이 불안정한 주거, 불투명한 식량 공급, 감당하기 어려운 생활비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만 새로운 기술과 산업에 대한 사회적 투자도 가능해진다. 식량과 농업은 민주주의의 초석 이러한 점에서 식량과 농업은 단지 생계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권과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는 기본권의 토대이며, 이는 기본사회를 구성하는 유기적 구조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 식량은 생존을 위한 소비재를 넘어 인간다운 삶을 위한 공공재로 재정의되어야 하며, 농업은 그러한 권리를 실현할 기반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따라서 식량과 농업은 공공성과 지속가능성을 갖춘 ‘기본적인 공공식료체계’로 통합적으로 설계되어야 하며, 이것이 기본사회 실현의 출발점이자 핵심 축이 되어야 한다. 2017년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대학(UCL)의 글로벌번영연구소(Institute for Global Prosperity, IGP)는 ‘보편적 기본서비스(Universal Basic Services, UBS)’ 개념을 제시하며 모든 시민이 소득 수준과 무관하게 필수적인 공공서비스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보건의료, 교육, 민주주의와 사법 서비스를 포함해 주거, 식량, 교통, 정보 등을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기본 조건으로 제시하였다. 이 가운데 특히 식량은 단순한 생존 수단을 넘어 민주주의의 일상적 실현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식량과 농업이 민주주의와 만나는 지점은 분명하다. 시민이 먹는 식재료가 어디에서, 어떻게 생산되고, 누구에 의해 유통되는지, 이에 관한 ‘알 권리’를 보장받을 때, 민주주의는 식탁에서부터 시작된다. 지역 푸드플랜 수립, 공공급식 식단 결정, 학교텃밭 운영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시민은 정책의 수혜자가 아니라, 설계자이자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 식량과 농업의 결정 과정에 시민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생활 속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실질적인 통로이며, 이는 공동체의 신뢰를 회복하고 정책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식량은 또한 의료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영양 불균형은 만성질환의 주요 원인이며, 건강한 식생활은 예방 중심의 의료체계를 가능하게 한다. 지역 보건소와 연계된 맞춤형 식단 제공, 고혈압・당뇨 환자를 위한 식이 처방, 노인을 위한 공동급식 서비스 등은 건강 수명 연장과 의료비 절감에 기여하며 공공의료의 사각지대를 줄이는 역할을 한다. 교육 분야에서도 식량은 단순한 급식 재료 이상의 교육적 의미를 가진다. 지역 농산물을 활용한 학교급식, 식생활 교육의 정규 교과 편성, 학교텃밭과 농촌 체험 등은 아동과 청소년이 지속가능한 농업과 지역경제를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학교는 단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니라, 공공성과 공동체성이 살아 있는 실천의 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 주거 영역에서도 식량과 농업은 공동체 기반의 생활환경을 구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공동주택 내 커뮤니티 키친, 마을텃밭, 마을급식 공간 등은 1인 가구와 고령자에게 식생활과 돌봄을 동시에 제공하며 사회적 고립을 완화하고 이웃 간의 연결을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다. 주거 복지와 식생활 복지를 결합할 때 도시 또한 삶의 질을 회복할 수 있다. 정보 영역에서는 디지털 기술과 결합된 식량과 농업이 새로운 공공성을 창출한다. 블록체인 기반의 생산・유통 이력 공개, 식품 안전 정보 제공, 농식품 바우처와 공공급식 정보 통합 플랫폼 등은 소비자의 선택권을 확대하고 정보 접근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한다. 디지털 식생활 정보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모두가 평등하게 접근해야 할 공공서비스로 기능해야 한다. 이처럼 식량과 농업은 민주주의, 의료, 교육, 주거, 정보 등 다양한 기본서비스와 유기적으로 연결된 구조적 기반이다. 우리가 식량과 농업을 보편적 기본서비스로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단순한 복지정책이 아니라 시민의 삶을 구성하는 조건 자체를 공적 부문이 책임지는 새로운 사회계약이며, 기본사회가 지향하는 회복과 성장의 가장 실천적인 출발점이기도 하다. 기본사회를 향한 구조 개혁 이러한 기본사회를 실행 가능한 구조로 만드는 핵심은 지역 단위의 사회적경제다. 협동조합, 마을기업, 사회적기업은 공공급식, 로컬푸드, 치유농업 영역에서 생산과 돌봄, 교육과 일자리 창출을 함께 수행하며 지역 공동체를 복지의 주체로 전환시킨다. 예컨대, 협동조합이 운영하는 학교급식센터는 기본교육과 먹거리 보장을 연결하고, 장애인 돌봄농장은 기본돌봄과 농업 일자리 창출을 동시에 실현하는 모델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복합 위기, 즉 글로벌 통상 압력, 생활물가 불안정, 주거 양극화는 단기 대책으로는 넘을 수 없는 구조적 과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삶을 지탱하는 기반을 공적 부문이 책임지는 새로운 사회 설계, 곧 기본사회서비스를 중심으로 한 구조 개혁이 필요하다. 식량과 농업, 돌봄과 주거, 교육과 의료는 더 이상 시장의 논리에만 맡겨둘 수 없는 공공의 기반이다. 이 기반을 새롭게 설계하는 것이 바로 기본사회다. 식탁에서 시작된 변화가 지역으로, 사회 전체로 확장될 수 있도록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언이 아닌 실행이고, 복지가 아닌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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